현대미술 박람회에 가면 어김없이 만나게 되는 유명한 작품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탈리아 화가 루초 폰타나(Lucio Fontana, 1899~1968)의 추상미술 작품이다. 아무런 설명도, 인지할 만한 그 어떤 구체적 형상도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오랜 기간 사람들의 마음을 꾸준히 사로잡아왔다. 폰타나는 1934년 추상창조(Abstraction-Creation)라는 그룹에 가입한 후 30년 넘게 꾸준히 하나의 조형 탐구만을 해왔다. 그의 작품에 항상 붙는 ‘공간개념(Spatial Concept)'이라는 제목은 그 탐구 과정을 함축한 상징적 용어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무의 화면에 단지 몇 개의 벤 듯한 곡선만 보이는 것이 오랜 조형 탐구의 결실이라는 것이 좀 의아하다.
루초 폰타나 〈공간개념: 신을 기다림〉 1963년
서양미술사를 되돌아보면 ‘공간’을 화가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재현해 왔는가를 알게 된다.
신 중심의 중세 사회에서 화가들은 인간이 거하는 자연계의 3차원 공간을 재현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림의 바탕을 모두 자연을 초월한 금빛으로 처리해 신의 존재를 상상하였다. 그러다가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문화가 태동하자 화가들은 다시 인간 세상으로 관심을 돌렸고 인간이 사는 3차원의 자연 공간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원근법 기술을 창조했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르자 화가들에게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인식이 싹텄고 이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며 추상으로의 길을 연다. 즉 저마다의 방식으로 3차원의 원근법을 해체하고 다양한 추상의 세계를 창조한다. 폰타나의 방식은 캔버스라는 평면 조건에 구멍을 똟거나 베는 작업을 통해 원근법에 근거한 3차원의 공간 구축을 무화(無化)하고 평면 저편에 자리한 무한 공간을 여는 것이었다.
이 발견을 위해 그는 3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고 그 세월이 작품 안에 힘으로 내재하며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이탈리아어로 “베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tagliare에서 온 <베기(tagli) 시리즈>는 그의 대표작이다. 빨강, 파랑, 노랑, 초록 등으로 채색된 캔버스 화면을 이젤에 세우고 커터 칼로 단숨에 천을 베어낸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대신 베는 행위를 매번 반복한다. 그러나 결코 지루하지도 매너리즘에 빠지지도 않는다. 매번의 행위가 새롭고 신선한 힘을 불어넣는다.
그것은 파괴가 아니라 무한으로의 인도이며 평화를 주는 안식처라고 화가는 말한다. <베기 시리즈>는 말하자면 폰타나가 오랜 기간 조형 탐구를 통해 추구한 보이지 않는 무한 공간의 궁극적 차원을 암시하는 기호(sign)인 것이다.
20세기 추상화가들은 보이는 것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세계로 관심을 돌렸고 그 끝에서 아마도 나름의 방식으로 종교의 지평에 가 닿았을 것이다. 폰타나가 <공간 개념>의 주 제목에 빛(Luce), 신을 기다림, 삼위 일체 등의 부제를 붙이는 것 역시 그 문맥에서 이해된다. 캔버스 천과 물감의 물질(物質) 이면에 펼쳐지는 아득한 무한 공간과 정신세계를 ‘베기’의 행위가 열고 있고 그 무한 속에 자리하고 있을 신의 존재를 화가는 매번 ‘베기’ 행위를 통해 상상하는 것이다.
20세기에 성(聖) 미술은 사라졌다고들 한다. 그러나 화가들이 창조한 독창적인 조형 세계를 끝까지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한 번도 가보지 않는 미지의 세계로 한 걸음 내딛게 된다. 종교(religion)의 어원이 끊어진 것을 다시(re) 이어주는(ligare) 것일 때 피안(彼岸)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작품이라면 종교미술의 일면이 없지 않을 것이고 그 하나의 예로 루초 폰타나의 추상 작품을 감상해 보았다.
신사빈 박사
이화여자대학교,『미술사의 신학』 저자, 예목원 연구위원
출처 : 가스펠투데이(http://www.gospeltoday.co.kr)